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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冬 (해동)

W.랑피(@langP_)   

Hiccup X Astrid     

 

 

 

버크의 봄은 늦다. 아니, 오히려 봄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일 정도로 머나먼 북쪽의 섬은 연중 내내 춥기만 하다. 아홉 달 눈이 내리고 세 달 우박이 내리는 곳에서 따뜻하고 사방에 꽃이 만개한 풍경은 그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낙원일 뿐이다.

 

 

 

“눈은 이제 지긋지긋해.”

 

 

 

이 말을 누가 했더라. 러프넛이었나? 십 수 년 넘게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라곤 시들 줄 모르는 침엽수와 눈밖에 없으니 이제 지겨울 만도 했다. 여름에도-여름이라고 해 봤자 추운 건 매한가지지만-산꼭대기의 눈은 녹을 줄도 모른다. 버크만 해도 눈 천지인 곳인데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드래곤 엣지는 말할 것도 없다. 겨울 지난 거 맞지? 계절을 따져 뭐해. 사계절이라 할 것도 없이 눈이 내리고, 눈이 녹고. 계절의 구분은 그 뿐이다. 눈이 내리면 추운계절, 눈이 녹으면 따뜻한 계절. 계절감각 참 단순하구만. 언젠가 쌍둥이가 나눴던 대화로 기억한다.

 

 

 

단순한 계절인 만큼 젊은 연인들에게도 계절에 따른 낭만 따위, 존재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제 남자친구인 녀석도 계획에만 몰두해 낭만을 찾을 여유는 없어 보인다. 물론 자신도 오랜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보단 눈앞의 작전과 임무가 중요했다. 할 일과 여유는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라고.

 

 

 

“다음 공격할 곳은 여기야.”

 

 

 

히컵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에 그려진 한 섬을 가리켰다.

 

 

 

“무인도로 위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고의 중요한 사업장 중 한 곳이야. 헤더가 목격한 것만 해도 철창이 수십 개에, 그 안엔 지플백들이 바글바글하지.”

“왜 하필 지플백들만 모아둔 거야? 가죽? 고기? 지플백 먹어봤자 맛도 없다고! 가스 냄새가 고기까지 난단 말이지.”

“터프넛, 지플백 고기 먹어본 적 있어?” 피쉬렉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없지, 내 친구여. 나 같은 라이더는 타보기만 해도 견적이 나온단 말씀이야. 버글러에선─”

 

 

 

그만! 그만해. 듣다 못한 피쉬렉이 손을 내저었다. 둘의 대화(?)에 옅은 한숨을 내쉰 히컵이 설명을 계속했다.

 

 

 

“저번에 헌터들에게 들어서 알다시피, 지플백 가죽은 최상품이야. 헌터들이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지플백 가죽으로 만든 거고. 그 외의 것들은 전부 군도 밖의 다른 부족들에게 판매하는 것 같아. 아직 드래곤을 적대시하는 부족들 말이야.”

“그럼 작전은 언제 시행할 거야?”

“내일 자정. 그때 비고와 라이커는 드래곤 투기장에서 경매를 진행할 예정이야. 그쪽을 가만히 놔두는 건 아쉽지만, 일단은 이 작전에 집중해야지. 다들 훈련장으로 모여.”

 

 

 

* * *

 

 

 

“모두 수고했어. 나랑 아스트리드는 잔당들이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갈게. 먼저 엣지로 돌아가 있어.”

 

 

 

우─ 걱정 마, 히컵. 네 마음 다 아니까. 뭔 소리야? 휘파람을 불며 능글대는 스낫라웃을 가볍게 받아쳤지만 무의식적인 당황스러움은 미처 숨기지 못한 듯 했다. 눈치 없는 쌍둥이들까지 킬킬대는 걸 보면. 그럼 우리 먼저 돌아가 있을게. 네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늦게 돌아오진 말라고, 친구. 아 쫌! 저도 모르게 붉어진 귀는 다행히 떠오르는 아침 해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다.

 

 

 

다른 라이더들이 섬을 모두 떠났음에도 히컵은 제 옆에 서있는 아스트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영락없이 속내를 들켜버린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아악 어떡해, 못 쳐다보겠어!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턱밑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참았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일출에 예쁘게 물든 하늘빛 눈동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컵, 나더러 왜 남으라고 한 거야? 어색한 정적을 깬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있어서.”

“히컵, 너 의외로 낭만적인 구석도 있구나?”

 

 

 

아스트리드가 엷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는 히컵이 퍽 귀엽게 보였다.

 

 

 

“버크나 엣지에서는 꽃을 보기 힘들잖아. 여기는 헌터들에게서도 꽤 멀리 떨어진 남쪽이니까. 너랑 같이 오고 싶었어.”

 

 

 

불행히도 비고의 사업장이었지만 말이야. 마지막 말에 실소를 흘리며 그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섬 자체가 산이 높지 않고 작은 편이라 드래곤을 탈 것도 없이 걸어가다 보니 나무의 수가 적어지며 이윽고 꽃이 만개한 들판이 나왔다.

 

 

 

“우와.”

“…….”

“진짜, 진짜 아름다워.”

“마음에 들어?”

“엄청. 같은 들꽃이라도 엣지랑은 느낌이 완전 달라. 이렇게 많이 피어있는 건 처음이야.”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헤더가 알려줬어. 역시. ㅁ, 뭐야 그 의미는? 아니? 아무것도. 얼굴 좀 펴. 그녀가 토라진 듯 뚱해진 히컵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올리며 웃었다.

 

 

 

“고마워, 히컵.”

 

 

 

아스트리드가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자 히컵의 얼굴이 화하게 달아올랐다. 히컵, 너 얼굴색이 꽃이랑 똑같아. 일출 때문에 그래. 변명은 어설프기만 하다.

 

 

 

“어떻게 여길 나한테 보여줄 생각을 했어?”

“우리가 살던 곳은 겨울밖에 없으니까. 계절이 있다고는 해도 눈이 많고 적은 것뿐이잖아.”

 

 

 

너랑 봄 속에 있고 싶었어. 히컵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람에 흐드러진 꽃내음이 폐를 간질하게 채웠다. 너한테서 꽃향기가 나. 어느 샌가 몸에 밴 진한 꽃향기가 심장을 터뜨려버릴 만큼 벅차올랐다. 숨을 참아도 어디선가 향기가 퍼지는 느낌이다. 마주치는 시선 속 어린 연인의 눈동자는 이미 한 떨기 꽃과도 같아서. 잔잔하면서도 열정적인 서로의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이윽고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 순간 피부를 간질이던 바람의 느낌은 사라지고 오롯이 향기만이 느껴진다. 이것이 네 체향인지, 아니면 진한 꽃내음에 코가 마비되어 버린 건지. 작은 섬 절벽 위 꽃밭에는 하나가 된 연인과 부끄러운 듯 바르르 떨리는 꽃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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