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너무도 달랐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자신의 눈을 스치고, 입술엔 알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졌다. 이상하였다. 꿈인데, 꿈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희뿌연 어둠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꿈이라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깨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 손길이 자신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천천히, 볼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조심스러워, 심장이 방망이질 치고, 피가 심장 아래서 들끓어 발끝에서 귀끝까지 빨갛게 물들어가는 듯 싶었다.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이상하였다. 그 전에도 이런 꿈을 많이 꿨었지만, 시야가 이렇게까지 어두웠던 적도 처음이었다. 이러한 의문이 흐릿한 어둠속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결국 히컵의 눈꺼풀을 이런 이상야릇한 꿈을 분명히 하기 위해 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내 곧, 그의 눈동자는 그러한 의문보다 훨씬 더 크게 뜨이게 만들었다.

 푸른빛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서 불안함을 띠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은 상황은 히컵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놀란 탓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 푸른빛 눈동자만을 붙잡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가 손을 떼려는 순간, 강하게 붙잡았다. 그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늘 꿔왔던 꿈과 너무도 똑같아서, 이번에도 역시 꿈일 것만 같았다. 아스트리드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눈동자가 자신의 눈에 들어왔지만, 이 또한 자신의 못난 바람이 그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듯 싶었다. 분명 꿈과 현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눈을 떴던 것인데, 오히려 더욱 더 혼란스럽고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너무도 낯설고 설레여서 오히려 심장 어딘가가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일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못난 바람이 꿈으로나마 실현 시킨 것 같았다. 슬픔은 심장을 물드는데 그치지 않고 눈가 근처까지 차오르게 만들었다. 히컵은 눈을 감았다. 비록, 꿈이라 하더라도 이 못난 모습을 아스트리드에게 보여주기가 싫었다. 자신의 못난 마음이 만들어낸 이기심을 그녀에게로부터 숨기고 싶었다. 이번 꿈은 너무도 잔인했다.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을, 가질 자격도 없는 이 마음을, 더욱 더 갖고 싶게 만들었다. 이미 늦어서 가질 수도 없는 마음인데도 말이다. 히컵은 다시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제 자신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서 그의 슬픔이 베인 웅얼거림은 같이 밀쳐지지 못한 채,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 웅얼거림 탓 인걸까? 흐려져 가는 의식이 다시 희미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아까와 뭔가 굉장히 다르고 미묘한 느낌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 미묘한 느낌은 자신의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숨결이 자신의 입술 근처에서 맴돌았다.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는 손의 감촉도 아까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듯 싶었다. 응? 손의 감촉? 히컵은 당장 제 눈을 번쩍 뜨였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심장과 함께, 아스트리드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눈을 뜨려는 순간, 히컵도 재빨리 눈을 꽉 감아버리고, 아까와 같은 자세로 잠든 척을 하였다. 자세는 그대로였으나, 심장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딘가에 부딪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날뛰었다. 그러나 아스트리드가 순식간에 자기로부터 도망치듯 멀리 사라져버리자, 그의 심장은 그대로 얼어붙어 쿵하고 떨어져 버렸다.

 히컵은 아릿한 제 가슴을 잡았다. 이번에도 제 자신이 그렇게 자초했으면서, 아스트리드의 떠나간 자리가 그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낸 듯 싶었다. 히컵은 절로 모르게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알 수 없는 상처와 서운함이라니······. 이쯤되면, 비고보다 자신이 더 뻔뻔하고 미친놈인거 같았다. 그런데도, 아스트리드를 향한 마음은 끊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양심과 자괴감이 괴로움이 되어 자신을 있는 힘껏 내리쳐도 그녀를 향한 마음이 깨지지를 않는다. 오히려 더 견고해지고, 커져서 이제는 감당하기도 힘들만큼 자신의 모든 곳을 장악해버렸다. 그럴수록 내면을 향한 조소도 커져갔다. 누군가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리드를 잡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것은 잠시나마 자신의 곁에 다가와 제 입술을 훔치려했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에 '아주 어쩌면' 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졌다. 그마저도 꿈이었던 것이라면······. 자신의 못난 마음이 만들어낸 잔인한 상상이라면······.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히컵의 마음을 괴롭히다, 결국 그의 몸을 아스트리드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로 옮기게 만들었다.

 아스트리드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돌아봐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이를 증명하듯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히컵은 벽에 반사된 희끄무레한 빛에 기대어 그런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팔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 언제나 그의 뒤에 그녀가 있었기에, 이렇게 뒷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뒤돌아봐줬으면 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구석이 여기저기 마구 찔러 대서, 그저 이렇게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새삼 이렇게 보니, 어깨가 굉장히 작아보였다. 어깨 갑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이 축 늘어진 그 어깨가 너무도 작아보여, 감싸 안아주고만 싶어졌다. 그런 제 마음에 히컵은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자신을 할퀴며 왔는데, 감싸 안아 주고 싶다니······. 히컵은 제 주먹을 조용히 쥐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도 잠시나마 가라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이런 생각이 퍼져나갔다.

왜 그 때, 눈을 떴을까? 왜 그 때, 손을 놔버렸을까? 그러한 의문은 자책감이란 화살이 되어 몸 여기저기를 아프게 스쳐지나갔다. 그 자리에 아쉬움과 서운함이라는 못난 마음이 발자국을 찍었고, 자신의 곁에 왔다가 휑하니 가버린 아스트리드를 향한 못난 제 마음이 소금을 뿌렸다. 그런 자신이 뻔뻔하다며, 비웃음이 그 자리를 아프게 쓸고 지나가며 또 다른 생채기를 남겼다. 히컵은 괴로움에 덮혀 비명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리드를 향해 누워있기엔 자신의 염치없는 마음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 또한,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반대로 돌아서 누웠다.

 

 바깥은 여전히 뜨거운 햇살을 쏟아냈고, 닭장 안은 여전히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문 틈 사이로 들어온 뜨거운 바람은, 닭장 안의 서늘한 기운을 만나, 차갑고 한기 어린 바람이 되었다. 그 바람은 닭장 안을 여기저기 휩쓸고 지나다니면서  히컵과 아스트리드 주변도 한 번씩 맴돌고 지나갔다.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을 잠시 떨던 아스트리드는 무의식중에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이끌려 몸을 돌렸다. 그 기운이 좋아 살짝 감싸쥔 제 손을 그쪽을 향해 뻗었다. 차가운 바람은 잠시 아스트리드의 손에 머물며 따뜻한 기운이 되었다. 그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진 걸까? 히컵 또한 잠결에 여러 번 뒤척이다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늘한 바닥과 달리, 손끝에 낯설지 않은 따뜻함이 닿았다. 그 또한, 그 기운이 좋아 자신도 이끌려, 그 따스함을 잡았다. 닭장 안은 여전히 쾌적하고 시원했다. 간간히 문 틈 사이로 서늘한 바람도 들어왔다. 하지만 둘이 잡은 서로의 온기가 서로를 데웠고, 잠결에 잡은 그 따뜻함이 좋아 서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