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도피
W.랑피(@langP_)
Hiccup X Astrid X Tuffnut
너는 내게 여름하늘과도 같아.
오래된 전자상의 낡은 텔레비전에서는 연이은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될 것이라는 퍽 절망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떨어트린 건지, 어느 샌가 보이지 않게 된 부채를 그리워하며 연신 손부채질만 해대며 낮은 해상도 속 아나운서의 입모양에 눈길을 던졌다.
그는 유난히 더위를 잘 탔다. 전생에 연중 내내 추운 곳에 살기라도 했는지, 유독 여름이면 맥을 못 추릴 만큼 더위에 늘어지기만 했다. 정 더우면 그 답답해 보이는 레게머리라도 잘라 보라며 주위에서 힐난하듯 말을 던져대었지만 저 스스로도 이번 여름에야말로 자를 것이라며 벼르다가도 결국 자르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았다. 결심을 굳히고 미용실 앞에 섰다가도 으레 뒷걸음질 치며 발걸음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장발이 자신의 외적인 상징이라도 되는 양 가끔씩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더라도 끝내는 단발로 자르지 못하고 긴 머리를 고수했다. 여름엔 더워도 겨울에는 나름 긴 머리가 따뜻하단 말이지. 어김없이 올해도 여름을 나는 방법이라고는 긴 머리 덕에 따뜻할 겨울을 그리며 머리를 틀어 올린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태양에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맨발로 걷는다면 금방 발바닥이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도로 위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며 하릴없이 걷기만 했다. 제 쌍둥이 여동생이 옆에 있었더라면 더워 죽겠다느니,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달라느니 실없는 소리로 여동생을 화나게 했겠지만, 지금 그의 옆에는 푸념 하나 들어줄 사람 없어 그가 할 행동이라고는 그저 말없이 땀을 뻘뻘 흘려대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어째 나보다 네가 더 더워 보인다니.’
인적 드문 마을 어귀에서 만난 것은 아침부터 어딘가로 사라진 쌍둥이 여동생이 아닌 지금 당장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이 더운 날씨에도 연습을 할 체력이 남아도는가. 땀을 흘리는 이마와 다르게 어깨에 기댄 테니스 라켓이 하나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를 통통, 발랄하게 쳐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방향을 틀어 벗어나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친 이상 피하는 자신을 그녀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끝까지 쫓아와 왜 피하냐며 자신을 추궁하겠지. 오래 붙잡혀 있을 순 없으니 적당히 간단한 인사치레만 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오늘 연습 있었나봐?”
“아니, 오늘은 나 혼자. 히컵이 연습상대 해주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코빼기도 안 보여서 이때까지 혼자 하고 있었지.”
혹시 히컵 어디 있는지 봤어? 제 눈앞의 한가한 상대를 놔두고 이 자리에 없는 연습상대를 찾는 그녀에게 내심 비쭉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어딘가에 틀어박혀 기계나 만지고 있을 녀석을 찾아 뭐해. 네가 불러봤자 덥다는 핑계로 나오지도 않을 텐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대화를 이어나가겠다는 듯 아스트리드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방학하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디 틀어박히다 나온 거야?”
“그냥 뭐…… 나만의 장소에 있었지.”
“또 러프넛이랑 싸웠어?”
아니거든. 무슨 내가 걔랑 싸울 때마다 어디 기어들어가는 맘 약한 녀석도 아니고. 매번은 아니지만 꽤 자주 어딘가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데. 경험에만 입각한 편협한 사고는 좋지 않아, 아 씨. 뭐래. 능청스러운 대꾸에 아스트리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이야기는 됐고… 지금 어디 가는 길인거야?”
“남의 사생활을 캐내려 하는 것도 별로 좋지 않아, 아 씨.”
“아씨 진짜 이게───”
끝내 욱한 아스트리드가 화를 내려다 말고 스스로 말을 끊었다. 이 녀석한테 화내 봤자 뭐하나, 다 내 손해지. 순전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이었다. 그냥 얘는 제 갈길 내버려 두고 히컵이나 찾아야지. 얜 대체 어딜 간 거야?
“너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가던 길 마저──…”
“히컵이랑 요즘 사이 안 좋아?”
방금 전과는 달리 대화를 피하고 싶어 하는 상대와 대화를 이어가려는 상대가 뒤바뀌었다. 얌전히 가던 길 보내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치고 들어온 상대의 말에 순간적으로 아스트리드의 미간이 옹송그려졌다. 질문한 당사자도 멋모르게 내뱉은 말에 적잖이 놀랐지만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한 번 터진 입은 쉽게 다물리질 못했다.
“걔가 오늘 너 연습상대 해준다고 했잖아. 약속을 했으면 진작 나타나야지. 여친 혼자 연습하게 놔두고 뭐하는 짓이람.”
왜 여기서 갑자기 질투는 못생긴 것들이나 하는 거라던 스낫라웃의 말이 떠오르는 건지.
“……터프넛.”
“미안, 나도 모르게 입이 멋대로 굴러갔어.”
아스트리드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민망한 마음에 애꿎은 눈알만 계속 도륵거린다.
“아무래도 내가 더위를 먹었나 봐.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음에 보죠, 아 씨.”
결국 마지막엔 제 할 말만 던져놓고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뜀박질을 시작했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발을 멈춘 곳은 그녀가 궁금해 했던 장소였다. 방학하고 여직 여기서 틀어박혀 지낸 걸 알면 너나 그 녀석이나 가만히 놔두질 않겠지. 마을 입구 쪽의 숲은 나무가 우거져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 옛적부터 그가 자주 아지트로 사용했던 장소였다. 숨을 고르자 어느덧 뉘엿뉘엿하던 황혼이 자취를 감추고 어느덧 어두운 하늘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저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와중 알콩달콩한 연인들의 사이가 조금이나마 멀어진 틈을 타 비집고 나온 제 3자의 어리숙한 마음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멀어진 것은 그들 사이가 아닌 나 자신이었음에도. 권태로워 보였던 것은 그들이 아닌 저였다. 어쩌면 그 호의는 단순히 권태로운 자신을 위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같이 설 수 있을지언정 곁에 설 순 없는 존재였다.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높았다.
너는 내게 여름하늘과도 같아. 그런데 구름 때문에 내 눈엔 보이질 않구나.
열대야가 무색하리만치 서늘한 바람이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