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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장맛비

W.엠레(@ImjustyourLemon)   

Hiccup X Astrid     

 

 

 

톡.

 

차가운 물방울이 아스트리드의 콧등에 떨어졌다. 그대로 타고 내려와 입술을 지나쳐 턱에 슬며시 맺힌다.

 

왠 비람.

 

잔뜩 흐린 하늘을 보며 원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 바로 옆에서는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팡, 팡 소리를 내며 하나 둘 피어났다가 빗속으로 유유히 멀어졌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학교가 마치고, 아이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간 정문은 빗소리 때문인지 더욱 쓸쓸했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여름 장마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를 골려 주고 싶은 건지.

 

어렸을 때 그 녀석이 데리러 왔었지.

 

 

 

 

불현듯 꼬마였을 적이 생각나 아스트리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소꿉친구, 아니 소꿉친구였던 그가 생각나서였다. 딱 이런 날이었다. 잔뜩 흐린 하늘에 쏟아지는 비에. 바쁘신 부모님과 우산을 나눠 쓸 친구도 딱히 없는 자신. 얇은 여름옷 아래로 와 닿는 싸늘하고 축축한 공기보다 더 사무치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 뒤에서 불쑥 우산을 든 손이 튀어나왔었더랬지.

 

"아, 아스트리드. 내꺼 우산 같이, 같이 쓸래?"

 

더듬더듬 홍조 어린 얼굴로 말을 하던 꼬마아이가 아직도 선연하다. 눈부신 초록색 눈동자에 별을 뿌려 놓은 듯했던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던. 자신을 좋아해 제대로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던 앞집 아이.

 

"혹시, 그, 싫은 거야?"
"아니. 좋아."

 

아스트리드의 말에 헤벌쭉 입이 벌어지던 히컵이었다.
결국 자그마한 우산에 의지해서 서로 손까지 꼭 잡고 집에 나란히 같이 갔던 날. 이웃이었던 둘은 헤어지는 게 아쉬워 집 앞에서 한참 애꿏은 물웅덩이를 찼더랬다.

 

히컵과 아스트리드는, 그 이후로 쭉 붙어 다니다가 중학교 때 학교가 갈라졌다. 학교가 갈라져도 인사하자는 말, 자주 연락하겠다는 말 등을 남기고 그들은 늘 함께 가던 학교가 아닌 각자 다른 곳으로 향했었지. 그리고 히컵은 그 어떤 말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왜 그랬어, 히컵. 왜 약속을 어겼어.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식 날, 그녀는 훌쩍 커버린 히컵을 보았다. 자신의 과거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은, 순간 헷갈렸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초록색 눈과 주근깨는 그대로였지만, 그 익숙했던 것들 때문인지 오히려 소년의 변화는 더욱 낯설었고 어색했다.

 

 

 

"저기."

 

한참동안 과거 회상에 젖어 있던 아스트리드는 갑작스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우산....... 없어?"

 

마치 그때처럼.

 

아스트리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자, 다시 목소리가 물어왔다.

 

"우산, 같이 쓸래?"

 

"......."

 

뭐라고 대꾸해야 될 지 몰라 아스트리드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을 오해했는지, 망설임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물어 온다.

 

"......싫겠지?"

"......아니."

 

아스트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름 잎사귀의 초록색을 담은 눈이 그녀를 오롯이 담고 흔들린다.

 

왜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다시 말을 거는 것일까, 너는. 내 조용하고 외로운 세계를 채웠던 아이. 이제는 불쑥 커버린 모습이, 둘이 서먹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그 모든 시간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집, 가는 거지?"

 

히컵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 괜히  더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응. 가자."

 

팡, 하고 우산이 피었다. 크기가 그닥 크지 않은 투명한 우산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우산을 든 히컵 옆으로 바싹 붙은 아스트리드. 약간 긴장한 그의 팔이 걷어올린 소매 밑의 맨살로 느껴졌다. 나란한 한 쌍의 발이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촉촉하게 젖은 길 위에 파문을 일으켰다.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아스트리드는 피식 웃었다.

 

아련했던 그 때, 풋사랑의 추억.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러고보니 이 자식, 아무 말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지. 괘씸하다는 생각에 괜히 히컵을 놀려주려 팔짱을 꼈다. 움찔하는 정직한 반응에 쿡쿡 웃음이 났다.

 

"싫어?"

"아니....... 좋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뒷말에 히컵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아니, 그, 그게. 좋은게 아니라. 좋은 건 맞는데....... 아, 이게 아니라......."

 

더듬더듬 어떻게는 수습해보려는 그 모습이 아직도 어릴 적 같다고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왠지 모를 포곤함을 느끼는 것은 그저 소꿉친구였던 그와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결국 말을 끝까지 수습하지 못한 히컵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한 우산 아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기계적으로 발걸음만 옮기다, 문득 아스트리드가 물었다.

 

"이사 갔었잖아."

 

히컵이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뒤이은 말에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아 그거. 하고 말하고는 다시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사실 그 때 말이야......."

 

이사 가기 전에, 고백하려고 했었거든. 히컵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머쓱하다는 듯 조그맣게 말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말하는 것보다는 어제 있었던 일인 양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루 종일 고민하다 결국 이사 간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는 솔직한 이야기에 아스트리드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때는 어렸지, 하는 아스트리드의 말에 그랬지, 하고 그가 맞장구쳤다. 둘 사이의 어색했던 공백이 모두 비에 씻겨내린 듯했다.

 

한참을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 아스트리드의 집 앞에 도착했다. 미진하게 남는 아쉬움에, 아스트리드는 괜히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히컵도 아쉬울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우물쭈물하며 뭔가 말하려는 듯했다.

 

"고마워, 데려다줘서."

"으응."

 

히컵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까치발을 든 아스트리드의 입술이 그의 볼에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끝까지 붉어진 얼굴이 인상적이다.

 

"싫어?"

 

장난스레 아스트리드가 물었다.

대답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아니.  좋아......."

 

잔뜩  붉어진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던 히컵이 더듬더듬 완성되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저, 저기. 아스트리드. 그러니까......."

 

눈을 맞춰오는 히컵의 얼굴은 어떠한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예전부터 쭉, 조,  좋아했어."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말을 하는 것조차 벅찼다. 힘겹게 속마음을 꺼낸 히컵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혹시. 나랑 사귀는 거......  싫을까?"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잔뜩 긴장한 히컵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 좋아.

 

히컵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우산을 한껏 아스트리드 쪽으로 기울인 채 걸어 어깨가 축축히 젖은 것도 모른 채로, 그는 아스트리드를 와락 안아버렸다.

 

 

 

 

 

오늘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여름, 장맛비 속에서. 긴 공백을 지나 사랑하던 소녀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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