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멀리 아스트리드의 기척이 잠잠해지자, 히컵은 그제서야 막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부터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한 탓에 진정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심장의 떨림은 진정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가 자신의 입술을 겹치려던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 싶었고, 그녀가 자신 곁에서 순식간에 멀어진 순간에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 싶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휑한 바람이 되어 닭장 안을 여기저기 쓸고 다녔고, 그것이 다시 제 마음을 꿰뚫고 지나갔다. 히컵은 조심스레 눈을 뜨고, 아스트리드를 찾았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왔으나, 거리까지 들어오진 않았다. 저멀리 떨어져 있는 아스트리드와 자신의 거리가 마치 지금 둘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듯 싶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쓰려왔다. 자신이 자초한 일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이 자신을 덮칠 때가 가장 괴로웠다. 히컵은 언제나 아스트리드 앞에만 서면 항상 머뭇거리고 망설였다. 투슬리스를 만나기 전에도 그러하였고, 앨빈을 상대하면서부터도 그러하였다. 잠시나마 자신의 마음과 그녀의 마음 앞에 분명했던 적도 있었으나, 수많은 적들이 자신과 버크를 뒤흔들어댔고, 투슬리스와 소중한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기는커녕, 적들을 막아내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아스트리드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리드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었다. 비록 그 관계가 친구, 그 이상에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켰다. 그것이 그녀에게 미안함을 가지게 만들었다. 한때, 치기어린 감정이었다 하더라도, 어찌됐든 친구 이상의 감정을 나눴긴 하였다. 허나,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과 위험한 상황 속에,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놨었어야만 했고, 거기엔 아스트리드도 제외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적들을 막아내는 사이에, 그녀와 자신 사이의 관계는 자연스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고, 아스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이해한다며 오히려 환히 웃었다. 그것이 너무도 고맙고 미안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 했고, 그녀를 신뢰한다는 마음으로 바꾸려했다. 아스트리드는 동료로써 더없이 믿음직한 존재였고, 의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이상하였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고 갑갑하였다. 과연 괜찮은 건가? 아스트리드와 자신 사이는 이걸로 괜찮은 건가? 간혹 이런 알 수 없는 의문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것은 스나웃라웃을 정학시킬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스트리드가 스나웃라웃의 쓸데없는 짓으로 인해, 하마터면 바닥에 곤두박질 칠 뻔했을 때, 순간 눈앞이 새까매졌다. 아무 생각도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공포에 서린 푸른빛 눈동자만이 자신의 눈에 강하게 들어왔다. 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땅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도 점점 비워져갔다. 온 몸에 피가 차갑게 식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가는 도중에, 그녀를 잡았다. 두 팔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새하얘졌던 머리도 다시 그려지려는 순간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기어이 자신의 심장은 그녀를 대신해 땅에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그 천하의 아스트리드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기절하였다. 얼마나 놀랐던 건지, 손끝마저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순간, 아스트리드 눈동자에 서렸던 공포감이 이번엔 제 몸으로 몽땅 건너와 버렸는지, 모든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히컵은 생각할 새도 없이, 한 손으로는 아스트리드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제 손에 비해, 그녀의 손은 너무도 차가웠다. 행여나 놓칠세라 그녀의 손을 더듬어 계속해서 붙잡고, 붙잡았지만, 어떻게 붙잡아도 그녀의 손은 자꾸만 차갑게 식어가는 거 같아 꼭 움켜쥐는 수밖에 없었다.
'안돼, 아스트리드. 안돼. 제발······.'
그나마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그의 심장을 잠시나마 되돌려준 것은 움켜쥔 손을 통해 전해져오는 아스트리드의 미세한 맥박이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안색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그것이 히컵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히컵의 마음이 점점 다급해질려는 찰나, 아스트리드의 입술을 통해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히컵이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끝도 잠시 까딱하고 움직였다. 그것을 느낀 히컵이 그제서야 한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식은땀이 흘렀으나, 히컵이 계속 아스트리드의 손을 붙잡아준 덕인지,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히컵은 땅에 내려앉는 순간, 아스트리드가 불편하지 않게 조심스레 안아서 바닥에 뉘였다. 이런 아스트리드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숨이 절로 막혀왔다. 이내 곧, 아스트리드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히컵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자신의 손길이 이상하여 멈칫하였다. 하지만, 주변에 라이더 애들의 눈도 많고, 무엇보다 아스트리드가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려 했기에 갈 곳을 잃어버린 손은 얼른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히컵은 잠시 속으로 갸웃거렸으나, 아스트리드가 일어난 모습을 보고 금방 지워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스나웃라웃을 본 순간 순식간에 달라졌다.
"나 스나웃라웃식 후퇴는······하지 않는 거야! 클릭 클릭 붐!"
기가 막혔다. 지금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를 판에, 스나웃라웃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눈치조차 못 챈 것 같았다. 어딘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그저 화 한번 내고 끝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번만은 묘하게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뜻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고, 머리는 그보다 더 차갑게 식었다. 그 이후, 히컵은 스나웃라웃을 정학시켰고, 스나웃라웃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스나웃라웃이 떠나자, 아스트리드가 다가왔다.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어, 히컵"
그 말에 히컵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연습 훈련 할 때도 저 녀석을 의지 할 수 없으면, 다음번에 데걸을 만나게 됐을 때, 그 때도 저 녀석을 의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겠어?"
히컵은 괜히 뭔가 찔린 듯 오히려 아스트리드에게 화를 내듯이 답하였다. 아스트리드의 미간이 잠시 움찔하자, 히컵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상하다. 너무도 이상하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아스트리드의 말에 뭔가 묘하게 찔렸다. 아스트리드 때문이라고? 아니다. 이건 그저 스나웃라웃이 자신의 명령을 어겨, 벌을 준 것 뿐이다. 그 이전에도 스나웃라웃은 몇 번이나 자신의 명령을 어겼고, 오늘은 그 도가 너무도 지나쳤다. 그것이 모여 지금 한꺼번에 터졌던 것뿐이다. 결코, 아스트리드 때문이 아니다. 물론, 아스트리드가 떨어졌을 때, 순간 자신도 아찔하였으나, 그건 그저 친구가 위험에 빠지자 놀란 탓에 그런 것뿐이다. 히컵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마음 속 의문 하나가 싹을 텄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사실은, 처음이었던 그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닐까?'
히컵은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다. 이미 아스트리드와의 관계는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붙잡고 싶어 한다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미 한번,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지었다. 또다시 그 빚을 만들고 싶진 않다. 히컵은 가볍게 웃으며 털어내려 했지만, 이러한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그 고개를 드는 빈도수가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히컵은 외면하였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의문도 점점 외면해지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순간 보면, 항상 시선 끝엔 아스트리드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을 땐, 자기도 모르게 눈길로 먼저 아스트리드를 찾고 있었고, 훈련을 하다보면 아스트리드를 무의식중에 눈길로 쫓고 있을 때가 많았다. 멍하니 혼자 있을 때면, 그녀를 떠올렸고, 심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히컵은 당황하였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한 때 치기어린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아스트리드보고 다시 처음이었던 그 관계로 돌아가자 하기엔 그녀의 마음을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았다. 비록 어렸을 때라 하더라도, 그녀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 마음을 우습게 만드는 건 자기 자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자기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 상태에다가, 지금 아스트리드에게 다가갈 수도, 다가가서도 아니 되였다.
히컵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등을 돌린채 누워있는 아스트리드가 보였다. 아스트리드의 마음은 뭘까? 내심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알 수가 없어졌다. 그랬기에 단념도 해봤고, 포기도 해봤다. 그녀는 자기와 처음이었던 그 관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지? 거기에 더해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자신과의 관계에서 '친구' 로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아스트리드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스나웃라웃이 있는 것 같았다. 스나웃라웃이 계속 그녀에게 들이대는데도,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는 여전히 싫은 내색을 보였고, 이따금씩 스나웃라웃을 쏘아 붙이긴 하였으나, 이전과는 달리 그 빈도가 많이 줄었다. 그것이 묘하게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쾌함을 주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이전에도 간간히 이런 느낌을 받았으나, 이정도로 신경을 긁는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아스트리드가 스나웃라웃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 속 어딘가가 초조해졌다. 에이 설마 싶다가도, 가끔씩 그녀가 스나웃라웃과 가까워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춰 설 때가 많았다. 만약 그러하다면, 진짜로 그러하다면, 이젠 정말로 이 마음을 끊어내야 한다. 다시 이 마음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모자라, 스나웃라웃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건 정말 한심한 짓거리다. 자신은 이미 늦었다. 그 때로 돌아가기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무엇보다, 둘의 관계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제 자신이었다. 그러한 자책감이 그의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이렇게 만들었으면, 적어도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마음은 참으로 뻔뻔하고도 이기적이었다. 그 행복이 자신이길 바라는 마음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 마음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스트리드가 잠시 행방불명 됐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때 히컵은 스나웃라웃과 잠시 실랑이를 벌였었다. 사실 남쪽으로 향하는 건 누가 해도 상관없었으나, 스나웃라웃이 가겠다 한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심장 아래서 들끓었다. 결국, 그 감정이 앞서 자신이 먼저 남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아스트리드가 걱정되어 나서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갔었다. 하지만 굳이, 스나웃라웃을 뿌리쳐 가면서 남쪽을 향한 저의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다. 이해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였다. 이 마음을 이해해버리면,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한심한 놈이 되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멋진 사람이었다. 이번엔 자신이 그녀에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실 자신은 그러한 처지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여기서 그쳤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 마음은 정말로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을 괴롭혀왔다.
아스트리드는 언제나 그에게 있어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언자였다. 대부분의 크고 작은 일들은 피쉬렉과 이야기를 했지만, 중요하거나 중대한 일들은 항상 아스트리드를 먼저 찾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여주며 들어주었다. 답을 찾지 못해, 머리를 감싸고 있으면, 그녀가 손을 내밀어주면서, 얘기해주었다. 진심 어린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입술로 눈길을 옮길 때가 많았다. 푸른빛 눈동자와 달리 붉은빛을 머금은 도톰한 입술. 맑고 온기가 투명이 도는 입술이 자신을 향해 속삭이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마음도 간질간질 움직였다. 저 입술에 닿는 감촉은 어떠할까? 부드러울까? 말랑말랑할까? 마음은 어느 샌가, 아스트리드의 조언을 가리고, 그녀의 입술만을 담은 상상을 그려냈다. 풍성하고 긴 속눈썹. 자신을 향해 수줍게 감긴 두 눈. 부끄러움을 머금은 입술과 떨리는 숨결. 그 숨결을 자신의 입술을 통해 느끼고 싶었다. 투명한 온기가 돌아 따뜻하고 달콤할 것만 같은 입술. 그 입술이 물기를 머금은 듯 조금씩 벌어졌다.
"히컵?"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돌아오고, 얼굴은 화르륵 달아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아, 아, 아냐. 아스트리드. 그, 그냥 생각할게 많아서······ 미안, 나 먼저 일어설게."
히컵은 허둥지둥하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그러곤 아스트리드가 보이지 않는 벽에 기대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힘껏 쳤다.
'미쳤군. 미쳤어! 대체 뭐하자는 건데? 아주 양심까지 팔아먹고, 잘하는 짓이다. 세상에서 너만큼 뻔뻔하고도 이기적인 놈은 없을 거다. 사람이 염치가 없으면, 선이라도 지켜야지. 이제 와서 뭘 어쩔껀데?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너면서, 붙잡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한심하다. 너무도 한심해. 내가 기어코 미쳤나보다.'
그렇게 몇 번을 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움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처음엔 조금씩 일렁이더니, 이제는 거센 파도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휩쓸고 집어삼켰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트리드가 갑자기 다가오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처음엔 그저 꿈이라 생각했다. 그 이전에도 몇 번씩 이런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아스트리드가 보였고, 입가엔 고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눈빛에는 사랑스러움이 묻어났고, 길고 하얀 손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좋아 자신 또한 거기에 기대어 뺨을 부비 댔고, 그녀가 수줍게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면, 그 붉은빛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이 겹치고 포개어 질려는 순간, 항상 그쯤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면 캄캄한 어둠만이 있었고, 빛으로 덮여있던 세상은 눈꽃이 되어 흩어졌다. 그럴 때마다 씁쓸한 마음과 슬픔이 함께 몰려와 자신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