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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아스트리드는 다시 다른 이유로 불안해졌다. 히컵이 자신의 옆에서 자는 것도 문제였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기막힌 타이밍에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단 말인가? 과연 우연의 일치인걸까? 사실은 아까 전에 혼자서 생난리를 칠 때 살짝 깨버렸던 건 아니였을까? 그런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해 오는 동안, 히컵은 세상모르게 잠들었는지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변함이 없었다. 불안한 와중에서도 그 숨소리가 변함없이 뒤에서 자신을 감싸자 신기하게도, 불안했던 마음이 잠재워졌다. 저 정도로 깊게 잠든 걸로 봐선, 그냥 우연의 일치로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아스트리드는 기묘한 용기가 생겼다. 그를 가까이서 좀 더 바라보고 싶다! 그 용기에 힘입어 아스트리드는 히컵을 향해 몸을 돌렸다.

 히컵은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숨소리에 따라 그의 몸이 한 번씩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아스트리드는 어슴푸레한 빛에 기대어 히컵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히컵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는 건 처음 이였다. 아니, 자신의 마음을 알고 난 후에, 이리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히컵과 자신 사이의 거리는 딱 한 뼘 차이. 손을 들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 이에 홀린 듯 손가락 끝을 히컵의 눈가에 대었다. 히컵의 속눈썹이 잠시 파르르 떨었지만, 어슴푸레한 어둠 탓에 아스트리드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손가락 끝에 닿은 거리. 그렇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는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마음은 언제나 닿지 않은 거리였다. 항상 닿지 못한 그 거리를 이렇게나마 닿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이 스며들어와 용기가 되었다. 아스트리드는 이번엔 새근새근 잠든 히컵의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부드러운 손가락과 달리 손가락 끝은 까끌까끌 하였다. 항상 무언가를 조립하던 손이라 그런지 손끝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로 뒤덮여 있었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겹쳐 보았다. 항상 그의 손은 작다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의 손을 올려보니 그 누구보다 커다란 손이였다. 그녀가 오딘의 재앙에 감염 됐을 때, 이 커다란 손은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그녀의 얼굴만을 쓰다듬었다. 불안해하며 떨리던 그 때의 손이 감은 두 눈 속으로 들어왔다.

 아스트리드는 잠시 눈길을 돌려 히컵의 감긴 눈을 보았다. 쓸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저 눈이 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떠져서도 안 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몇 년을 꽁꽁 숨겨왔던 이 마음을 계속 숨길 수 있기에, 들키지 않을 수 있기에, 그녀는 그와 맞잡지 않은 다른 손을 꾹 움켜쥐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보고 싶다. 저 눈이 떠져 자신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나를 향해 환히 웃어줬으면 좋겠다. 언제나 이렇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를 바라만 보고 싶지가 않다. 그렇게 서로 상반된 마음이 이리저리 뒤섞이다 그녀의 손끝을 히컵의 입술로 인도하였다.

 어슴푸레한 어둠 탓인걸까? 모든 감각이 손끝으로 모인 듯 싶었고,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따갑고 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남자의 입술이 이리도 부드러울 수 있나 싶다가도 그 까끌한 감촉에 손길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어디서 고생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따가운 감촉이 자신의 마음까지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 입술을 한번 건드려보았다. 까끌한 히컵의 입술과 달리 자신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제 입술의 온기를 나눠주면, 그의 입술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요상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에 아스트리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털었다. 아무리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 된다. 히컵의 무방비한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손길을 거두려다, 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빛이 그녀의 눈길을 강하게 붙잡았다. 희끄무레한 빛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히컵의 얼굴에 모조리 다 모인 것인지 그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 환한 빛에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손길은 결국 머리의 명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그의 볼을 감싸 쥐고야 말았다. 그동안 손이 닿았던 곳과 완전히 다른 감촉이였다. 손끝에 닿았던 곳들은 죄다 거칠고, 까끌한 감촉들 뿐 이였는데, 손이 온전히 닿은 이곳은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드러운 느낌을 떨쳐내고 싶지가 않았다. 아스트리드는 혹시라도 히컵이 깨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눈을 바라봤지만, 눈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작은 안도감과 함께 이에 힘입어, 엄지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 그의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눈가가 시릴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다. 평소엔 다가갈 엄두도 못 가졌으면서, 히컵이 무방비할 때만 대범해지는 자신을 향해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러댔다. 그래도 아스트리드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비겁해져도 좋았다. 어차피 자신만 아는 비밀이 될 터이니, 이 순간만큼은 조금 비겁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의 볼을 어루만지는데, 결코 떠질 일이 없어야 하는 눈이, 결코 떠져서는 안되는 눈이, 천천히 자신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볼을 바라보던 푸른빛 눈동자도 초록빛 눈동자와 함께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을 머금은 눈동자와 초록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만났다. 푸른빛 눈동자는 불안함에 미세히 떨리고 있었는데, 초록빛 눈동자는 말없이 자신 앞에 있는 눈동자를 붙잡기만 하였다. 아스트리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한껏 헤집고 다녔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고, 뜨겁게 끓으며 정신없이 왔다갔다 거렸다. 심장은 쿵쿵 올리고,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울림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방금 전까지 주변에서 들려오던 작은 소리들마저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혼란스러워 하다가 잠시 진정한 틈에 집나갔던 정신이 퍼뜩! 하고 돌아왔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아스트리드는 얼른 손을 떼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내 곧, 다시 한 번 더 숨이 멎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떼려는 순간, 히컵이 갑자기 그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이번엔 아까보다 너무 놀라 그나마 열심히 돌아가던 생각까지 멈춰버렸다. 그저 멍하니 히컵의 눈만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초록빛 눈망울 속에 푸른빛 눈망울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어딘가 희뿌연 눈빛 이였지만, 그 초록빛 눈동자에 빨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는 꼼짝하지 않았다. 꼼짝할 수 없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의 색이 뒤섞여 반사 되는 게 너무도 선명하였다.

 그러기를 한참 후. 히컵의 눈꺼풀이 느리게 두어 번 껌뻑이고, 다시 스르륵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에선 뜻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웅얼거림에 아스트리드의 정신도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꼼짝도 못하는 건 여전했다. 손을 당장이라도 떼야 하는데, 히컵이 붙잡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손을 떼려고 하면 그 즉시, 히컵도 다시 눈을 뜰 테고, 어쩌면 정신까지도 완전히 깨버릴지도 모른다. 아스트리드는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즉에 입술에서 손을 멈췄더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무슨 바람이 들어 볼까지 감싸고 만 것인가. 그녀는 계속 속으로만 쩔쩔매다가, 문득 히컵의 한 웅얼거림이 귀를 타고 들어와 심장에 내리꽂는 것을 느꼈다.

"······지마, 내 옆······ 금만 더······."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까보다 심장이 더 심하게 요동쳤고, 그 소리가 자신의 귀를 막은 것 같았다. 그래서 얼굴을 더 가까이 했다.

"아스트리드, 가지마······, 내 옆에 조금만 더······ 있어줘."

 아스트리드의 눈이 커졌다. 머리로는 그 웅얼거림을 알아들었으나, 마음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스트리드는 좀 더 명확하게 듣기 위해 얼굴을 더 가까이 하였다. 이제는 정말로 조금만 움직이기만 하면 닿을 듯한 거리였는데도,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려 그 소리를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답답했다. 귀를 가까이 하였는데도, 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 싶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귀가 아니라 입술이 다가갔다. 아니다. 이것은 그저 거짓말일 뿐이다. 그 웅얼거림을 되풀이 하는 히컵의 입술을 훔치고픈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손끝에 닿았던 히컵의 입술은 따갑고 까끌거렸었다. 그렇다면 입술에 닿는 감촉도 손끝에 닿았던 감촉과 비슷할까? 자신의 입술은 부드러우니 그 입술을 포개면 그의 입술도 잠시는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성이 사라진 그녀의 입술이, 안타까운 마음이 지어낸 호기심에 이끌려 입술을 포갤려는 찰나였다. 툭! 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의 손을 붙잡던 히컵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느낌에 화들짝 놀라, 그녀는 순식간에 그에게로부터 도망치듯 멀리 떨어졌다.

 

 심장이 한없이 저 아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히컵은 다행히 깨지 않은 것인지, 아까와 같은 자세에서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는 혼란스러움에 제 입술을 깨물고 고개만 푹 숙였다. 히컵에게로부터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를 뻔했던 행동 때문에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눈동자로 닭장 안을 정신없이 방황하였다.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은 아까와는 다른 감정으로 진정할 줄을 몰랐다. 떨고 있는 한 손을 다른 손으로 꼭 감싸 쥐어도, 떨림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이러한 의문이 아스트리드 주변을 맴돌며 마구 찌르고 쑤셔댔다. 그 찔림이 너무도 아프고, 두려워 바닥에 다시 누울 수도 없었다. 그저 한쪽 구석 벽에 기대어 떨리고 있는 손을 붙잡고, 늘 그랬듯이 멀리서 히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아스트리드는 무릎을 모아 그 사이로 자신의 머리를 묻었다. 히컵은 아직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안다면 결코 이러지 않을 사람인 걸 알기에, 그것이 더욱 더 그녀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스나웃라웃과 항상 붙어있게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스나웃라웃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아는 듯싶다. 그가 그럴 때마다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쩌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라도 하면, 마음은 또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한 마음에 놀라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이러한 마음과 감정은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히컵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있어, 히컵은 마을의 천덕꾸러기였고, 자신 또한, 그러한 히컵에게 별 마음도,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4년 전, 그가 투슬리스를 만나고 나서부터 버크를 포함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둘의 관계도 바뀌었다. 4년 전 그 일 이후부터, 히컵과의 관계가 급속도록 가까워 진 적이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드래곤과 공존하게 되면서, 버크엔 수많은 적들이 생겼고, 그 적들은 언제나 같은 것을 노렸다. 히컵과 투슬리스. 그러한 까닭에 그는 언제나 납치와 감금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적을 쓰러트리면, 또 다른 적이 나타났고, 또 다른 적을 쓰러트리면, 새로운 적이 다시 또 나타났다. 그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히컵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여유조차 사라지게 되었고, 자신 또한 그러다보니 그와의 관계도 한때 치기어린 감정이라 여기며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히컵과 자신 사이의 관계에서 남은 건 '친구'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잔인하게도, 그 짧게 이어졌던 연인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음은 더 분명해지고, 강해졌다. 그러한 마음을 여러번 잘라내려 했으나, 항상 잘난 체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귀를 기울이며 듣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설레어 하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다정한 눈빛과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방금 전까지 굳게 다짐했던 마음도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버리곤 하였다. 그렇게 남몰래 다짐하고, 풀기를 반복하였으나, 이 모든 것 또한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아스트리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히컵이 있는 곳과 정반대로 돌아누웠다. 자신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데, 정작 히컵의 마음은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더 서글프게 만드는 것은 그녀를 대하는 그의 행동이었다. 스컬디 때만 해도 그러했다. 스나웃라웃이 자신에게 이상한 추파를 계속 던지고 있음을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히컵의 마음이 그 전과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의 무심한 눈빛과 마음대로 하라는 무미건조한 말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 팠다. 뭘 바라고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스나웃라웃을 쏘아 붙이거나, "그건 안돼" 란 말이 나오길 내심 바랬다. 아스트리드는 실망감과 서운함으로 얼룩진 못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이상한 추파를 던지는 스나웃라웃을 한 손으로 꺾고 스톰플라이에 올라타는 것으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히컵의 웅얼거림도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게 너무 기뻐서, 그의 숨결이 바로 제 앞에서 느껴지는게 너무 행복해서, 마음이 제멋대로 만든 상상에 취해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서글픔과 자책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자라나더니 이내 곧 무럭무럭 커져서 그녀를 온전히 덮어버렸다. 비록 히컵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긴 했어도, 아스트리드는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자신의 마음에 끝없는 생채기를 남겨도, 이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 히컵은 아스트리드를 믿고 있으니까. 그 믿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자기 마음을 꾹꾹 눌러담았고, 혹시라도 새어나가진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 하면서 애를 썼다. 다시 처음이였던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도, 그의 믿음으로 억지로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꾹 눌러담아 숨겨왔는데,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때 히컵이 깨기라도 했으면, 어찌되었을까? 완전히 깨어나 온전히 자신을 바라봐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 관계마저도 산산히 무너져 가루가 되고야 말 것이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깨지고 부서져,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어도, 그의 곁을 떠나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가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항상 그의 곁이 좋았다. 그마저도 깨져버린다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을 것 같다. 처음으로 느끼는 이 낯선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는데, 상처로 바뀌는 건 더더욱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언제나 그러하였는데,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실린 그의 숨결이, 꾹 눌러왔던 그녀의 마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상처투성이로 뒤덮여 있던 손끝. 까끌까끌했던 입술의 감촉. 그와 반대로 부드럽게 느껴지던 볼의 감촉과 자신의 손을 붙잡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록빛 눈동자. 처음으로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았고, 그도 처음으로 자신을 가까이서 바라봐주었다. 거기까지여야만 했다. 거기서 멈췄어야만 했다. 그랬어야만 했는데, 몽롱했던 그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보였다. 그 눈빛엔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며 어렴풋이 말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 눈빛에 홀려 마음은 이성을 지워버리고 거짓말을 지어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깨지는 순간, 자괴감과 비겁함이 그녀의 심장을 끌어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쳤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을 비웃듯 제 입술을 씹었다. 왜 이 마음에 잡아먹혀, 괴로움도 슬픔도 같이 느껴야 하는 것인가? 히컵이 자신을 향해 환히 웃어줄 때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져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것도 어쩌다 한번 뿐이고, 그 초록빛 눈동자가 온전히 바라봐주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마음을 꺼내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면 더 이상 이러한 서글픔도 아픔도 느낄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 마음은 아무리 지우고, 지우려 하더라도 다시 또 그리고, 그려낼 것이다. 아스트리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의 입술을 범하려 했단 사실이 가슴 깊숙이 칼을 박아 넣은 듯 고통스러웠고, 히컵이 깨기라도 하면 어쨌을까 하는 가정이 두려움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 어디선가 그녀의 우상인 핀 호퍼슨이 나타나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듯 하였다. 

'삼촌, 대답해주세요. 전 어찌해야만 하나요? 어떡해야만 하나요? 이젠 내 마음도 모르겠고,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점점 두려워져요.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강해져가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잘라낼 수 있을까요? 이젠 비겁한 짓까지 서슴지 않게 되요. 전 어쩌면 좋은 거죠? 이 혼란스럽고······불안한 마음을······어떻게 해야만 좋은 거죠?'

 하지만 문 틈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 외에는 어떤 답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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