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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머그컵(@zjvlemsajrmzjg)   

Hiccup X Astrid     

 

 

 

얼어붙은 땅이 녹아 피어오르는 흙 비린내에 코를 막았다.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멋대로 품에 파고든 봄바람 탓에 뼈가 시리다. 뭐가 그리 좋을까. 창문을 휘떡 열어젖히며 “마침내 봄이야!”, 기쁘게 외치는 멀치를 보며 히컵은 소리 없이 툴툴거렸다.

 

 

 

봄은 빈곤의 계절이요, 모든 것이 바닥나는 시기로다. 지난 겨울 내내 끊어질 일 없던 사람들이 발길은 더 이상 곳간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타적인 빈 곳간의 외로운 결말이다. 이제 막 싹이 트는 밭에다 대고 감자를 찾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조만간 아버지에게 양떼처럼 몰려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힘겨이 비집고 들어온 고버가 저를 불러내겠지. 이제 춘계대회 연습하러 가야지, 히컵! 이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는 이불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어도, 옷장 속에 꼭꼭 숨어도 꼬박꼬박 히컵을 찾아온다. 히컵은 저 멀리서 들리는 고버의 목소리에 순순히 벗어둔 조끼를 집었다.

 

 

 

 

 

 

“계속 이렇게 노력한다면 언젠가 네 인생에도 봄이 찾아올 거란다.”

“아까 아저씨가 저한테 ‘벌써 밀이 저렇게나 자랐구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미 봄이 온 줄 알았죠.”

 

 

 

히컵은 배에 힘주어 우스꽝스런 목소리로 고버를 흉내 냈다. ‘봄’이라는 단어에 괜스레 심술부리고 싶었던 탓이다. 히컵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새끼양이 별안간 메에에- 소리 내며 발버둥 치더니 고버 대신 히컵의 작은 머리에 알밤을 놓는다. 주저앉아 머리를 문지르던 히컵은 뒤늦게라도 새끼양의 행방을 좇으려 고개를 들었다. 운 좋게도 남쪽 방향에 우거진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놈이라 스벤이 화낼 텐데..”

 

 

 

고버는 골치아프다는 듯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어 누르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들이 쉬었다 내쉬기만 반복하는 고버를 향해 히컵은 머뭇거렸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올게요.”

“뭐?! 저, 절대 안 된다, 히컵! 너는 집에 가있어! 내가 찾으러가마. 괜찮아. 오, 이런! 오늘 점심쯤에 매그너스가 수리 맡긴 철퇴를 찾으러 온다고 했는데 완전 까먹고 있었잖아! 데릭도 온다 그랬고, 스토익이 맡긴 도끼 손질도 아직 못 끝냈는데..!”

“그러니까 제가 찾아올게요, 아저씨.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길도 다 아는걸요!”

“숲 속은 위험해, 히컵.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저도 벌써 13살이에요. 제가 못미더우신가요?”

“물론 나는 널 믿는단다, 히컵. 그렇다고 널 혼자 내버려 뒀다가는 스토익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미칠 노릇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저를 말리는 고버를 멍하니 쳐다보던 히컵은 홀로 입만 벙긋거리다 이내 꾹 다물었다.

 

 

 

“그래요, 아저씨가 맞아요. 저는 그냥 문제를 몰고 다니는 꼬맹이고, 강인한 바이킹이 아니니, 이런 간단한 일 조차 해내지 못할 것이 뻔하죠. 좋아요. 집에 갈게요.”

 

 

 

길고 긴 입씨름 끝에 히컵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봄비를 함빡 맞은 새끼야크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슬프게 돌아서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자니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 입맛이 썼다.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는 소년을 보며 주먹을 쥐락펴락 하던 고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히컵! 이리와, 히컵!”

 

 

 

고버는 화가 난 사람처럼 성마르게 소년을 불러 세웠다. 들키면 난 이제 스토익에게 죽은 목숨이겠구나. 고버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내 자신의 예정된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 언덕 위 혼자 사는 심술쟁이 영감도 아이의 구슬픈 눈망울을 쉽사리 외면할 수는 없을 거다. 고버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와 키를 맞추었다.

 

 

 

“찾으러가도 좋다.”

 

 

 

고버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담아둔 자리를 비워내었더니 속이 시큰거리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윗배를 문질렀다. 자리에 있지도 않는 스토익의 호통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구나. 고버는 냅다 고개를 탈탈 저었다.

 

 

 

“그래도 혼자서는 안 돼! 같이 찾으러 가자꾸나.”

 

 

 

15분 정도면 되겠지. 운이 좋다면 10분 안에 대장간에 달려가 메모정도는 남기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을 펼쳐가며 차근차근 계산하다 손가락 10개를 쫙 펼쳐 히컵을 향해 내밀었다.

 

 

 

“대신 10분만 기다려라. 나는 잠시 대장간에 좀 다녀오마. 금방 돌아올 테니 그 때 까지 꼼짝 말고, 응? 꼭 움직이지 말고 여기 있어야한다! 혹시 혼자 여기 있기 무섭다면 같이...”

“음,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여기서.. 혼자.. 꼼짝 않고...”

 

 

 

히컵은 말을 길게 늘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땅으로 파고들 것 같던 아래로 축 쳐진 입꼬리는 어디로 갔는지, 어느덧 바스스 맑은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손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아놓은 듯, 추욱 늘어뜨린 어깨 또한 원위치로 돌아간 지 오래인 듯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고버는 마른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주욱 쓸어내렸다.

 

 

 

“절대,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한다!”

 

 

 

히컵은 저를 향한 끝없는 당부가 저 멀리 마을 방향으로 사라질 때 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고버 아저씨는 상냥하지만 걱정이 너무 많아. 풀밭에 털퍽 주저앉은 히컵은 불만스레 속으로 주절거렸다. 히컵은 새끼양이 도망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로 애꿎은 땅을 긁어대던 중이었다. 별안간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새끼양이다. 급작스레 제게 닥친 소리에 놀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 히컵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느릿하게 한 바퀴 돌았다. 소년은 옆구리를 더듬어 가져온 것을 꺼내었고, 곧장 소리 난 쪽을 향해 달렸다.

 

 

 

걸음을 내딛을수록 어둑해지는 듯하여 잠시 멈추었다. 벌써 해가 진 것일까. 히컵은 고개를 들어 시간대를 가늠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여전히 낮이다. 다만, 서로를 얽어맨 잔가지들이 햇빛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간 것인지, 숲이 저를 빨아들인 것인지. 새 소리마저 아득하게만 들리는 이곳은 꽤나 오랫동안 어떠한 사람도 들이지 않은듯하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소년은 쥐고 있는 단검을 더욱 꼭 붙들고서 이를 악 물었다.

 

 

 

다시 한 번 양소리가 들리길 바라며 두 눈 꼭 감고 있던 히컵에게 웬일이었을까, 토르신이 소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어린 짐승의 소리에 히컵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메에에, 다시 한 번 양이 울었다. 혹여 놓칠세라 히컵은 즉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아래로 꺾인 나뭇가지에 뺨이 긁히고 우둘투둘한 길바닥에 박혀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음에도, 히컵은 새파랗게 질린 소리를 향해 쉼 없이 뛰었다. 아직 차디찬 봄바람에 목구멍이 알싸했다. 비틀거리는 히컵의 의도치 않은 손길을 받은 수풀이 파스락파스락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난데없이 날아와 눈앞을 스쳐지나간 무언가에 크게 놀라, 히컵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바른 뒷걸음질 쳤다. 당연히도 무언가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히컵은 눈앞을 스친 무언가가 향한 방향으로 억지로나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도끼였다. 아까부터 묘하게 겹치는 소리는 아무래도 잘못들은 것이 아닌듯하다. 나무줄기 한중간에 정확히 꽂혀있는 것을 보아하니 혹시 한 걸음이라도 더 빨랐다면 지금쯤 운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놓친 단검을 집어 들고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조급한 마음에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숲에 홀로 들어간 아이를 잡아먹는 무서운 괴물’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를 찾으러 온 고버는 더더욱 아니었다. 형태가 흐트러져 여기저기 삐져나온 땋은 머리와 봄볕에 뺨이 벌겋게 익은 아이였다. 걸어 나오며 저 멀리 보낸 시선을 찬찬히 당겨오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도끼의 주인인가보다. 이 무슨 망신이람. 히컵은 흘리지도 않은 눈물을 들킬세라 연신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음, 저기...”

 

 

 

맥 빠진 소리가 고대로 입 밖을 삐져나왔다. 그제야 소년을 발견한 건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러 닦던 소녀는 마치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그러니까... 안..녕?”

 

 

 

상체를 떠받친 손목을 호들호들 떨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디 제 멋대로 되는 게 있긴 하던가. 히컵은 말을 마구 지어 내보낸 자신의 입을 주먹으로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저기, 나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아이는 히컵에게 손을 내밀며 침착한 목소리로 드문드문 말했다. 도리어 당황했음이 분명하다. 단언컨대 이번이 여태 맞이한 봄들 중 최악의 봄일 것이고, 최악의 봄이 될 것이다. 상황을 무마하려해도 누군가가 제 머릿속을 까만 목탄으로 칠갑한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그렇지! 동면에서 깨어난 뱀들이 돌아다닐지도 모를 숲에 들어오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히컵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향해 제 손을 뻗으며, 또다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열기가 손바닥을 통해 아이에게 전해질세라 차마 손가락을 꼭 우그릴 수 없었지만,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 히컵의 손을 움켜쥐고서 끌어올렸다. 히컵은 갑작스레 저에게 가해진 인력을 뒤이은 반동에 떼밀리지 않으려 오른쪽 다리에 힘주었다. 다행히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소녀는 나무에 박힌 도끼를 빼내며 무뚝뚝한 사과를 건네었다. 받을 생각조차 없었던 사과를 떠안은 보답으로 본인도 사과해야하는 것인지, 히컵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사이 다시 돌아가려 수풀 속에 한 쪽 발을 넣는 아이를 발견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저기, 잠깐만!”

 

 

 

히컵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내뻗으며 아이를 불러 세웠다. 봄볕에 그을린 아이는 부름에 다시 힐금 돌아보았다. 일단 불렀긴 불렀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담. 말없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니 아이가 이유를 묻는다. 히컵은 초면에 묻는 질문들 중 가장 그럴듯한 것을 찾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으나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다. 통상적으로 초면에는 이름을 묻는다지만, 인연의 범주에 들지 않을 정도로 짧은 만남인데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히컵은 검지손톱으로 제 엄지손톱 밑을 꾹꾹 눌렀다.

 

 

 

“왜? 할 말 있어?”

 

 

 

채근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다급해진 히컵은 무심코 한 발 앞으로 내딛었고, 불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을 붙일 적절한 핑계를 찾아내었다.

 

 

 

“호..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이가 한 쪽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도끼를 어깨에 걸친다. 히컵은 삐죽 흘러내리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마도 일그러진 미소였을 것이다.

 

 

 

“다리를 다친 것 같아.”

 

 

 

갑자기 신발이 갑자기 꽉 끼는 것 같더라니. 마음 같아선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히컵은 아이의 도움을 받아 풀밭에 조심스레 앉았고, 드러난 맨발이 통통 부풀어 오른 것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날아온 도끼에 놀라 잔뜩 겁을 집어먹었을 때보다 부끄러워 어딘가로 꼭꼭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지붕에서 미끄러진 것도 아닌데. 아까부터 우리하게 아프기는 했다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발날에 무언가 톡 튀어나온 것을 보며 혹시 뼈가 부러져 어긋난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이 펼쳤다. 히컵은 아이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다친 발을 살짝 디디는 것만으로도 아주 끔찍한 통증이 밀려와 끝끝내 히컵을 주저앉혔다. 부목이라도 갖다 대야하나? 히컵은 퉁퉁 부푼 발가락을 흘깃거리며 생각했다. 한 발로 뛰어서 마을로 갈까 했으나 발가락을 곰질거리는 것만으로도 욱신거려 생각을 접었다. 고버 아저씨가 그 자리에 가만있으라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를 해보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의 시선에 뒷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듯하다.

 

 

 

“저기, 혹시 아까 전에 새끼 양 한 마리가 뛰어가는 거 못 봤어?

 

 

 

마주앉아 손을 대지도, 차마 거두지도 못하던 상냥한 아이는 히컵의 질문에 눈을 한 바퀴 굴렸다. 그래서 숲에 왔나보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가만가만 말하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컵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벤 아저씨네 양인데, 연습 때문에 허락받고 잠시 데려왔거든.”

“무슨 연습?”

“그... 봄에 열리는 대회 있잖아... 거기에 참여하려고.. 물론 이기는 건 기대 같은 건 하지도 않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대답을 들은 아이는 마치 무언가를 까먹고 있었던 사람처럼 두 손을 마주쳤다. 히컵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런데 이번엔 다리를 다쳐서 대회에는 못 나갈 것 같아. 잘 됐지 뭐. 사실 나는 대회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고.. 봄을 좋아하지도 않고... 시켜서 억지로 나가야 했지만..”

 

 

 

순서를 가리지 않은 말들이 마구 입 밖으로 쏟아져 장황하게 늘어진다. 예전부터 아버지와 고버 아저씨에게 지적받아온 몹쓸 버릇이다.

 

 

 

“나도 나가야해. 어른들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메달을 좋아하는지 몰라”

 

 

 

마침내 발견한 공통주제에 히컵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도끼 던지기 연습하고 있었구나?”

“아, 아니. 이건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거야. 메달 때문이 아니라.”

 

 

 

메달은 영광이고 목에 메달을 걸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어른들로부터 한동안 영예로운 대접을 받는다. 모든 아이들이라면 당연지사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인데 아이는 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실력도 상당해 보이는데 대체 왜? 어쩌면 기분나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들었지만, 이미 질문하고 난 뒤였다. 아이는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나는 커서 어른이 된다면 꼭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는 위대한 전사가 될 거야. 우리 가족이 버크를 보호해왔듯, 나도 적군이나 드래곤들로부터 우리 가족과 버크를 보호할 거야.”

 

 

 

히컵은 아이가 주먹을 꼭 쥐는 것을 말없이 보았다.

 

 

 

“그렇다면 너에게도 봄이 딱히 달갑지는 않겠구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 되면 겨울동안 뜸했던 드래곤 무리들이 돌아와 기껏 잡은 생선들을 훔쳐 달아나기 마련이었다. 버크의 봄은 언제나 빈곤의 계절이요, 빈 곳을 채움과 동시에 바닥나는 시기였다. 아이는 버크에 진정으로 기쁜 봄을 되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구나. 히컵은 찬찬히 지난 봄날 들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이끌려 다니기에 바빴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 일을 함으로써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구나. 지난 수 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아무래도 어른들을 데리고 오는 편이 좋을 테니 여기 가만있으라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렇게 노력한다면 언젠가 네 인생에도 봄이 찾아올 거란다.’

 

 

 

그제야 히컵은 지금까지의 지난 나날들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렇다고 겨울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른들이 말하는 봄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구나. 봄은 성장을 위해 반드시 내딛어야만 하는 첫 발짝이었고, 히컵은 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비로소 봄이다.

 

 

 

하여간 말이라곤 지독히도 듣지 않는다는 호통과 함께 주먹 끝으로 몇 차례 쥐어 박히었던 날로부터 이틀 정도 지났다. 몇 겹을 쌓은 베개위에 붕대를 친친 감은 다리를 얹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좀이 쑤셔 요 근처라도 잠시 돌고 오고 싶다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면 꽁꽁 묶어 침대에 매어놓겠다는 고버 아저씨의 으름장 덕에 가만 앉아 줄곧 책만 잡고 있었다. 꽉 감았던 천이 약간 헐렁해진 것을 보니 붓기가 조금은 빠졌나보다. 히컵은 저의 결심을 종이에 옮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의미 있는 것을 잃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히컵은 그 날 숲에서 만났던 아이의 상냥함을 잊지 않으려 계속해서 생각했다. 사실은 종이 한 귀퉁이에 아이를 그리기도 해보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러게 말이다. 저 또한 알 수 없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손을 내뻗었더니 어느새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들기며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 고버 아저씨라면 바로 제 옆에 앉아 저를 감시하는 중이고 아버지라면 바로 문을 열었을 텐데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고버는 갈아 끼운 의수가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확인하며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망할 놈의 감자를 언제쯤 수확할 수 있을지 재촉하러 온 사람 같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고버는 쿵쾅거리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아 글쎄 그거는! 아, 아스트리드구나. 무슨 일이니?”

 

 

 

처음 듣는 이름에 히컵은 목을 쭉 뻗어 문 밖을 보고자 했다. 물론 고버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 키가 작은 어른인지 어린 아이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짜증스러움이 가시고 반가움만 남은 목소리를 들으며 누구일지 추측하고자 했으나, 아저씨가 저렇게 반가워할 인물이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이따가 물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일으킨 상반신을 다시 기울였다. 잠시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고버가 돌아선 순간, 히컵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고버의 품에는 꼬질꼬질하고 작은 새끼양이 안겨있었다. 봄날의 숲에서 마주친 다정한 아이의 이름은 아이만큼이나 참으로 아름답다고, 히컵은 이를 종이에 새겨 아끼는 책 속에 감추었다. 감히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고, 내뱉지 못한 말을 가슴 속에 꼭꼭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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