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의 부재
W.여름(@yeireun9_9)
Hiccup X Astrid
들었어? 내가 물었다.
상담실 문 앞에서 마주친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겨우 아니,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애써 눈을 피했지만 우린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가장 애매한 사이, 표현하자면 그랬다. 뒤따라 나온 선생님은 그에게 ‘왔니, 잠깐만.’ 하는 짧은 한마디로 양해를 구하고 그늘진 계단을 내려가며 통화를 이었다. 저 선생님의 통화는 절대 잠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학교에 다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금방 모퉁이를 돌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고, 그는 체념하며 철제 계단에 앉았다. 나 역시 이상한 마음이 들어서 곁에 앉았다. 계단의 폭이 생각보다 좁아서 누군가가 지나가려면 한 명이 일어나야 할 정도였지만, 슬프게도 아직 방학이라 누가 지나갈 일은 거의 없었다. 앉아버린 이상 일어나기까지 조금 시간을 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거 같았다. 보통은 가벼운 대화를 하겠지. 보통.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 치고는 대화가 적은 편이긴 했다. 열 살, 그즈음까지는 서로의 집에 자주 심부름을 다녔고 필요한 말 정도는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좋은 아침이야. 안부 전해달래. 날씨는 좀 별로지, 그런 것들. 네가 도시로 이사 가던 그 한겨울에 시리게 빨간 손으로 이름 모를 풀꽃을 엮어다 건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장난이야.’ 다음의 침묵이 그렇게 길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다음 날 평범하게 집 주소와 이메일 따위를 적어다 주었을 것이고 때로는 뜸하기도 하면서 가벼운 봄바람을 타고 보통의 관계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렸을지도 모르고, 다시 돌아온 너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관계를 규명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인사조차 망설이는 사이임에도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면 화면 한가득 클로즈업은 아니더라도 너, 또는 너의 흔적이 어디엔가 꼭 등장하였고 나는 이 영화의 감독에게 너의 의미를 따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네 표정을 보아하니 배우도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극 속에 던져진 듯했다. 애초에 너에게 물을 생각이 없긴 했지만.
봄이야, 벌써. 네가 말했다.
봄. 나에겐 봄을 그리는 남국의 번역서와 영화들이 막연하기만 했다. 나라의 최북단인 이 섬에서 느낄 수 있는 봄의 흔적은 약간 늘어난 초록이 전부여서. 우리에게 없는 –있다 하더라도 너무 순간이라 선조들이 발견하지 못한- 계절임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그러게, 벌써.
어느새 길어진 삼월의 햇빛이 발끝에 닿고 말았다. 어, 어, 그래. 하는 무미건조한 어른의 목소리 역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된 문장 하나 꺼내지 못했다. 나로 인해 상담이 연기되었다는 이상한 죄책감 역시 불필요한 것이었다. 몸을 일으켜 선생님께 자리를 비켜드리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낯선 향기에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너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다음에 또 봐. 나는 꼭꼭 눌러 말했다. 작은 끄덕임이 눈에 담겼다. 다정한 눈빛이 지나간 자리에 주인 모를 작은 박동이 남았다. 다음에는 널 볼 즈음이면 봄을 완전히 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