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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순간

W.별찌(@Byeoljji_public)   

Hiccup X Astrid     

 

 

 

밖에서 몇 번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 이내 곧 잠잠해졌다. 닭장 안은 꽤 어두웠다. 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어둠 속 벽에 반사 되어, 어슴푸레한 빛을 띄었다. 그 빛이 닭장 안을 감싸, 눈으로 어느 정도 식별이 가능하였다. 히컵은 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환한 빛에 기대어 닭장 안을 둘러보았다. 안은 생각보다 꽤나 넓고 쾌적했다. 항상 비질을 해둔 것인지 바닥은 흙먼지 하나 묻어나오지 않았다. 터프넛이 닭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잘 느껴지는 곳이었다.

 엣지에서의 여름은 버크에서 맞는 여름과 차원이 다르다. 버크의 여름은 초목이 푸르게 변하고, 산꼭대기에 쌓여있던 눈이 한 움큼 짧아지는 정도였다면, 엣지는 그보다 더했다. 짧은 옷을 입고 있어도 더위 때문에, 땀으로 긴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다. 그런 상황에, 백야까지 찾아왔으니, 다들 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피로에 지쳐 쓰러질게 뻔하였다. 하지만 이 닭장 안은 달랐다. 바깥에 쏟아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햇빛도 막아낼 뿐만 아니라, 지금이 여름이었는지 잊을 정도의 시원함과 서늘함이 닭장 안을 맴돌고 있었다.

 히컵은 아까까지만 해도 쉐도우 윙스를 해치우느라 잠은 커녕, 피곤도 느낄 틈이 없었다. 다른 드래곤이였으면 모를까, 이렇게까지 지독하고, 지능적인 놈들은 오랜만이었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자신을 잡겠다며 달려드는 놈들을 물리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는데 이런 지독한 놈들까지 붙었으면, 앞으로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가질 않아 암담하였다. 이렇게 쫓고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까?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닭장 안의 시원한 바람이 그동안 바짝 긴장해 달아올랐던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앞으로의 일들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히컵은 하품을 몇 번 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동안 꽁꽁 싸맸던 잠과 피곤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끝없이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듯 싶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른해졌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피곤함이었다.

 히컵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자신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제각각인 자세로 꿈나라로 향해 떠나있었다. 피쉬렉은 반듯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 헤더가 꼭 붙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물통을 품에 소중히 안고 자고 있었다. 스나웃라웃도 비슷했다. 한쪽 구석 벽에 붙어 왠 통나무를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는데, 간간히

'오이, 오이, 오이······.'

 하는 웅얼거림을 내며 뒤척이곤 했다. 쌍둥이가 이 중에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터프넛은 닭을 품에 끌어안고, 옆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 러프넛이 팔과 다리를 여기저기에 쭉 뻗고 잠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한쪽 팔은 터프넛 얼굴에 올리고, 다리는 피쉬렉 배 위에 올리고 자고 있었다. 터프넛은 닭을 끌어안고 잔 탓이었는지, 간간히 코를 골았고, 러프넛이 제일 크게 "드르렁 푸우" 거리며 자고 있었다. 피쉬렉은 그 소리가 꽤 거슬렸던 건지 러프넛에게 등을 돌려, 헤더 쪽을 향해 몸을 뒤척였다. 모두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보자, 히컵도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엣지는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데 머릿속에서 문득 떠오른 한 생각이 그의 눈커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아스트리드는 어딨지?'

 다른 라이더 애들은 보이는데, 이상하게 아스트리드만 보이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를 찾을려고 고개를 들으려 했으나, 일주일동안 누적된 피로가 히컵을 붙잡았다. 어떻겠든 고개를 들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피로는 오히려 더욱 더 그를 잠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안되는데······아직 아스트리드를 못 찾았는데······.'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벌써, 꿈나라를 향하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결국 이 말은 히컵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며, 메아리쳐 울다가 닭장 안으로 들어오던 바람결과 함께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한참 뒤, 라이더 중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아스트리드였다. 얼마만에 단잠이였던건지, 기지개를 피자 여기저기서 굳어 있던 몸이 짧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래도 졸린 느낌은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일주일 동안 멀리 쫓겨나 있던 잠기운이 다시는 쫓겨나기 싫다며, 붙잡고 매달려 있는 듯 싶었다.  어느 정도 잠을 떨쳐내자 문득, 깨어난 곳이 그녀에게 익숙한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스트리드는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처음엔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기 힘들어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곧 터프넛의 닭장이란 걸 파악했다. 하지만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여기로 옮겨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건 스톰플라이를 타고 날아오른 기억 밖에 없었다.

 스톰플라이를 타고 날아오르기 전, 그녀는 일주일 이상 잠을 자지 못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백야 때문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눈을 감아도, 햇빛이 워낙 강렬해서 몸이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훈련이라도 하면, 지쳐서 잠이 오지 않을까 싶어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그동안 잠을 못 잔 탓인지, 몸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훈련도 되질 않자 만사가 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던 몸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집중은 자꾸만 흐려지고. 이건 버크에 와서도 여전했다. 오히려 무역로가 다시 열리면서 생긴 잡다한 일들을 왜 자기들한테만 시키는 건지, 버크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는 건지, 속 안에서 그런 열불 비슷한 불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평소라면, 늘 했던 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을 텐데, 안 그래도 짜증으로 잔뜩 예민해져있는 신경이 이것을 굉장히 거슬리게 긁어댔다. 아스트리드는 참다 참다 기어코 오랜만에 삼나무 숲에 가서 애꿎은 나무들에게 도끼를 마구 던져대며 화풀이를 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원치 않았다. 전과 다르게, 제대로 명중시킨 게 별로 없었다. 결국 분노감에 찬 아스트리드는 삼나무 숲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나올 소리마저도 쉬어버리자, 그녀는 허탈한 한숨을 지으며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시원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갑갑하고 속상해졌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요즘 자신을 보면 뭔가 치졸하고 옹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한 사실이 그녀를 더 답답하게 만들고 울화가 치밀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히컵이 족장님과 따로 할 말이 있다며, 모두 엣지로 돌아가 드래곤을 목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스트리드는 그 말에 화색을 띠었다.평소였다면, 약간의 아쉬움이라도 느꼈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 그랬음 조만간, 속에서 무언가 폭발해 이성을 잃고 뭐라도 다 부수고 난리를 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삼나무 숲 정도가 아니라 버크를 부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피로에 지쳐있었다. 히컵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아스트리드는 다른 라이더 애들을 이끌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전, 히컵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심하는 표정이 언뜻 지나간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스톰플라이의 시원한 날개 짓에 히컵의 표정도 함께 털어져 나갔다. 스톰플라이의 날개 짓을 보니 어쩐지 짜증으로 가득 찬 마음도 털어져 나가는 듯  싶었다. 이에 아스트리드는 다른 라이더 애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엣지로 돌아서 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수많은 바람들이 그녀 곁을 스쳐지나갔다. 쌩하니 지나가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살랑살랑 그녀의 얼굴을 한번 쓱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도 있었다. 바람들은 그녀 곁을 그냥 지나가주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쌓였던 짜증과 불만, 불평, 분노도 하나씩 주워가주며 지나갔다. 그 덕에 아까보다 기분이 한 결 좋아졌다. 마음이 뻥 뚫리고 자신도 바람이 된 듯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양팔을 한 가득 뻗고 구름의 품을 느껴보았다. 팔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구름 속에 있자, 자신 또한 구름이 되어 흩어져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양 팔을 뻗고 구름과 바람을 느끼던 아스트리드는 이내 곧, 자세를 바꿔 하늘을 향해 누웠다. 눈을 감자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감각들이 느껴졌다. 아직은 여름이라 대부분 더운 바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지만, 간간히 시원한 바람도 섞여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한 번씩 만져주고 지나갔다. 바람은 머릿결도 한 번씩 빗어주고, 짜증과 더위로 열이 잔뜩 오른 머리도 시원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기분이 아까보다 훨씬 많이 풀렸다. 짜증은 가라앉고, 그 자리에 주체할 수 없는 황홀감과 흥분이 차올랐다. 심장이 쿵쿵 울리고, 세상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까 전만 해도 밀려오던 피곤함은 모두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 수 없는 기쁨이 대신하자 이 기분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빨리 나누고 싶었다. 아스트리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엣지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이후론 까무룩 정신을 잃은 듯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었고, 엣지를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기억이 없다. 감정 어쩌구 하면서 뭐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새까맣고 뜨문뜨문한 기억들이 알 수 없는 찜찜함을 주었다. 아스트리드 눈가에 작은 주름이 맺혔다. 뭔가 기억이 날듯 말듯 한데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자꾸만 제 턱을 매만졌다. 닭장 안을 감싸고 있는 어슴푸레한 빛이 제 머릿속도 어슴푸레하게 만드는 듯 싶었다. 아스트리드의 눈가가 점점 깊어져 가다가, 문득 그 자리에서 굳어갔다. 스톰플라이에 내려서 이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아스트리드는 사색이 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억이란 말인가? 그녀 스스로도 이런 어이없는 기억에 당황하였다. 혹시 꿈이라도 꾼 건 아닐까 싶어, 그녀의 미간을 더욱 좁혀보았지만 그러기엔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였다. 아스트리드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가보았다. 설마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이상한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들은 약 올리는 듯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뜨문뜨문하게만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황당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한 손엔 철퇴를 들고, 한 손엔 밧줄을 잡고 날아다니는 기억이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호탕하게 웃으며 엣지 여기저기를 날아다녔다. 아스트리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그 외에, 철퇴로 저글링을 하거나 스나웃라웃에게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머리만 지끈거릴 뿐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스트리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설마······ 히컵과 관련된 무슨 말까지 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스나웃라웃의 얼굴을 붙잡고 뭐라고 떠든 기억은 있는데, 내용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 용을 써 봐도, 작은 파편들이 번쩍하고 떠오르다,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안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 거리기도 바쁜 스나웃라웃에게 얼굴을 붙잡고 뭐라 얘기 한 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내용은 떠오르지 않다니. 내용을 떠올리려 애를 쓰면 쓸수록, 손에 힘도 절로 들어갔다. 아스트리드는 갑갑한 제 머리를 원망했다. 열심히 애를 써도 캄캄하고 뿌연 어둠만이 떠오를 뿐 이였다. 결국 아스트리드는 영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그 때 스나웃라웃의 눈도 약간 좀 맛이 간걸로 봐선 스나웃라웃 뿐만 아니라, 다들 제정신이 아니였을거라 하는 작은 위로로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작은 한숨을 내쉬다 문득, 자신 옆에 누군가가 등을 돌리고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아스트리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탓에 멀리 있는 형체들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형체는 분명 자신과 자신의 옆에 있는 것만 빼면, 다섯이 맞았다. 혹시라도 잘못 센 것은 아닐까 여러 번 눈을 크게 뜨고 세 보았으나, 다섯이 맞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자기 옆에 잠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혹시나 싶은 작은 기대감이 은근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 기대감에 이끌려 아스트리드는 조심스레 그 형체를 향해 손을 가까이 하였다. 하지만 설마 싶은 마음이 그녀의 손길을 붙잡았다. 그 설마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에 아스트리드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 고개를 세차게 흔든 후, 뭔가를 다짐하는 듯 다시 손을 뻗었다. 아스트리드가 조심스레 손을 뻗고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그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몸을 뒤척였다. 잠시 놀라 손을 주춤했던 아스트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히컵이 어째서 내 옆에!'

 그녀는 아까 전 뻗으려 했던 손을 들키기라도 한 듯, 다른 한 손으로 감싸고, 그것도 모자라 품 안에 꼬옥 숨겼다. 놀란 탓이였던걸까? 아님 설마 했던 사람이 맞아서 그런 걸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은 제멋대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스트리드의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든 건, 뒤에서 느껴지는 히컵의 숨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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